이디리움 역사를 시작한 8인…지금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블록미디어 스탠리 최 기자] 2014년 6월 7일, 스위스의 한 숲속에 위치한 ‘우주선’이라는 임대 주택에 모인 8명의 공동 설립자에 의해 이더리움이라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오늘날 이더리움의 시가총액은 1,500억 달러를 넘는다. 이더리움 탄생 이후 암호화폐 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ICO, NFT, Defi, IDO 등의...
[블록미디어 스탠리 최 기자] 2014년 6월 7일, 스위스의 한 숲속에 위치한 ‘우주선’이라는 임대 주택에 모인 8명의 공동 설립자에 의해 이더리움이라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오늘날 이더리움의 시가총액은 1,500억 달러를 넘는다.
이더리움 탄생 이후 암호화폐 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ICO, NFT, Defi, IDO 등의 개념부터 지금의 웹3(web3) 열풍도 이더리움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웹3(Web3)라는 개념조차도 이더리움 공동 설립자에게서 나왔으니까.
지난주 머지에 성공한 이더리움은 암호화폐 업계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상주의자들의 집단이 세운 탈중앙화에 대한 합의 개념인 이더리움에도 출범 초기 수 많은 내부 갈등이 있었다. 다음은 블록템포가 최근 보도한 8인의 이더리움 공동 설립자에 관한 기사 요약.
2013년 12월 이더리움 설립자는 5명이었다. 비탈릭 부테린, 앤서니 디 이오리오(Anthony Di Iorio), 찰스 호스킨슨(Charles Hoskinson), 미하이 앨리시(Mihai Alisie), 아미르 체트잇(Amir Chetrit) 등이 그들이고, 2014년에 조셉 루빈(Joseph Lubin), 개빈 우드(Gavin Wood), 제프리 빌케(Jeffrey Wilcke) 등 3명이 공동 설립자로 합류했다.
현재는 여덟 명이 뿔뿔이 흩어져 비탈릭만이 여전히 이더리움이라는 가업을 잇고 있다. 여덟 명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주된 이유는 이더리움이 영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영리 조직으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 때문이었다.
이더리움은 초기 8명의 공동창업자가 있었지만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부분 때문에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됐다.
# 이더리움의 경쟁자가 된 사람들
1. 커뮤니티 경쟁자 찰스 호스킨슨(Charles Hoskinson) : 카르다노
이더리움 창시자 5인 중 한 명인 찰스 호스킨슨은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나 원래 수학자를 꿈꿨지만 수학보다 비트코인에 더 매력을 느끼고 블록체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호스킨슨은 스위스의 이더리움 재단과 그 법적 틀을 책임지는 CEO로 임명되었다. 이더리움 개발 초기에 CEO로서 그는 이더리움 발전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특히 재단 설립 및 개발, 법적 프레임워크 수립과 기타 기초 작업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몇 개월 내에 끝나고 말았다. 다른 설립자들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호스킨슨은 이더리움이 영리 회사가 되기를 원하지만 비탈릭은 비영리 플랫폼이 되기를 원했다.
그가 이더리움을 이탈한 것에 대한 뒷얘기도 있다. 자진해서 떠났다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비탈릭이 그를 해고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은 서로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때때로 서로의 일처리 방식을 지적하기도 했다.
2016년 DAO 사건은 이더리움의 포크를 가져온다. 이 사건은 호스킨슨이 이더리움 클래식(Ethereum Classic. ETC) 지지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고 그는 이더리움을 떠나 카르다노(Cardano)를 설립한다. ADA는 카르다노 프로젝트 토큰이고 카르다노가 개발 중인 차세대 블록체인 스마트계약 플랫폼이다.
카르다노의 개발 방식과 이더리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카르다노가 실천보다 연구를 앞세우고 개발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지만 기존 산업에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암호화폐 ADA 암호화폐는 2021년 급성장했다. 카르다노는 사용자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커뮤니티 참여자를 늘림으로써 이더리움의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2. 퍼블릭 체인 경쟁자 개빈 우드(Gavin Wood) : 폴카닷
개빈 우드가 가장 찬사를 받은 능력 중 하나는 그의 강력한 엔지니어링 능력, 즉 합리적인 아키텍처 설계 및 프로그래밍을 통해 아이디어를 코드로 변환시키는 능력이다. 많은 블록체인 개발자들의 마음 속에 그는 슈퍼급 개발자이자 기술적 리더로 자리잡고 있다.
2013년 블록체인에 관심이 있던 개빈 우드는 오랜 친구를 통해 비탈릭을 만났다. 이더리움에 대한 부테린의 생각을 들은 후 개빈은 블록체인을 프로그래밍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비탈릭을 도와 이더리움 코드를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2014년 그는 마이애미로 가서 비탈릭과 다른 설립자들과 함께 이더리움을 설립했다. 여기에서 개빈은 이더리움 PoC 1 또는 알파(Alpha)로 알려진 이더리움의 첫 번째 작업 버전을 개발했다. 개빈은 이더리움의 첫번째 CTO가 되었고 2014년 블록체인 상태 머신의 첫 공식 기술 사양인 이더리움 가상 머신(EVM)을 정의한 ‘이더리움 옐로우북’을 저술했다.
이후 2년 동안 개빈은 공동 플랫폼 아키텍처 구축, 이더리움 C++ 클라이언트 대부분의 개발 작업을 완료하는 한편, 이더리움 스마트 계약 작성을 위한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언어인 솔리디티(Solidity) 설계를 포함한 이더리움 개발에 전념했다.
웹3(Web3) 개념은 2014년 개빈 우드가 제안한 것이다. 탈중개화, 자유로운 네트워크 환경을 구축하여 인터넷의 독점을 깨고 데이터, 개인 정보 등을 사용자에게 반환하자는 개념이었다.
여기에 그는 블록 체인을 사용하여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주요 플랫폼에 의한 사용자 착취를 없애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되도록 더 많은 진실을 사용함으로써 전체 사회가 더 이상 인위적인 신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봤다. 그는 웹3의 핵심 개념을 “신뢰는 낮추고 진실을 더 많이(Less trust, more truth)”로 요약했다.
2015년 말 개빈은 이더리움을 떠나 EthCore를 설립했다. 개빈은 도전을 좋아하는 야심찬 사람으로, 15개국에서 60명 이상의 개발자를 점차적으로 모은 후 러스트(Rust) 언어로 이더리움 패리티(Ethereum Parity) 클라이언트를 작성하자고 제안했고 EthCore는 Geth와 C++ 클라이언트를 훨씬 능가하는 성능을 가진 패리티(Parity) 기술로 발전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우고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이더리움의 완전 새로운 대체품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그가 생각한 블록체인 프로토콜 폴카닷(Polkadot)이다. 현재 폴카닷은 이더리움의 경쟁자 중 하나가 되었다.
개빈이 이더리움에서 떠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부 추측은 개빈과 비탈릭이 이더리움의 발전 과정에서 이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이후 일부 인터뷰에서 개빈은 하드 포크를 통한 이더리움의 거버넌스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ETH만을 사용해 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은 이더리움을 ‘자유 경쟁 DEX’가 되도록 하려는 초기 의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이더리움이 웹3에 대한 그의 비전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비춰진다.
# 파트너가 된 사람들
3. 부유하고 실력도 갖춘 조셉 루빈(Joseph Lubin) : 메타마스크와 컨센시스
영국인 조셉 루빈은 이더리움 창시자 8명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1987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전기공학과 컴퓨터 사이어스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루빈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음악 제작, 비즈니스와 금융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나중에 루빈은 암호화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캐나다 비트코인 얼라이언스(Canadian Bitcoin Alliance)를 통해 동료 캐나다인 디 이오리오(Di Iorio)와 알게 되었다.
2014년 비탈릭을 알게 된 그는, 비탈릭의 백서를 읽은 뒤 상당히 공감했고 공동창업자 그룹에 합류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기꺼이 참여했다. 이더리움의 아키텍처를 작성하기 위해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도록 제안하고 담당했으며 주로 기술적인 부분을 맡았다. 재력가 집안 출신인 그는 디 이오리오와 함께 초기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적 지원도 제공했다.
나중에 이더리움이 비영리 조직이 되기로 결정하자 루빈은 비전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이더리움 커뮤니티를 떠났다. 그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더리움 개발 회사 컨세시스(ConsenSys)를 설립하고 인터넷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암호화폐 사용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작은 여우 지갑 ‘메타마스크(MetaMask)’가 있다.
루빈은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기 원했기 때문에 컨센시스(Consensys)는 이더리움 오픈 소스 개발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 많은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하거나 수 많은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인큐베이팅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물론 여전히 이더리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파일코인(Filecoin)이나 폴카닷 등 다른 플랫폼에 기반한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현재 컨센시스는 다른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되었고 JP모건, UBS, 영국 석유기업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많은 기존 기업과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4. 비트코인 매니아 미하이 앨리시(Mihai Alisie) : 아카샤
앨리시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2010년 시비우에 있는 루시안 브라가 대학(Lucian Braga University)에서 제어학, 경제정보학과 통계학을 전공했다.
비탈릭은 초기에 비트코인을 연구하기 위해 몇몇 포럼과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비트코인 매니아인 미하이 앨리시가 우연히 그것을 보고 두 사람은 적극 접촉하기 시작했고 2011년 말 마침내 비트코인 메거진을 공동 창립했다. 당시 수석 에디터가 비탈릭, 편집장은 앨리시였다.
나중에 비탈릭이 이더리움을 만들자 앨리시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앨리시는 스위스에 이더리움 기지를 구축하는 데 지원을 했고 초기 스타트업을 합병함으로써 스위스가 이더리움 크라우드 펀딩 활동에 지극히 중요한 비즈니스 인프라와 법적 프레임워크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어 신생 암호화폐 회사인 이더리움의 은행 계좌 개설(당시에는 어려움이 매우 많았던 일이라고 함), 사전 판매 활동에 매우 중요한 법적 프레임워크에 대해 변호사나 스위스 공무원을 상대로 한 교섭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앨리시는 “당시에는 위대한 아이디어와 커다란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성공할 수 있을 지도 불분명했다”고 말했다.
이더리움 초창기에 그는 이더리움 재단 부의장으로써 이더리움의 전략 계획 수립을 도왔다. 2015년 말까지 이더리움이 영리조직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재단에서 물러나 이더리움의 사회적 프레임워크인 아카샤(Akasha)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아카샤는 이더리움과 IPFS를 사용해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했고, 앨리시의 소셜 프레임워크은 이더리움2.0과 파일코인(Filecoin)과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 암호화폐를 떠난 사람들
5. 은퇴한 앤서니 디 이오리오(Anthony Di Iorio)
비탈릭과 마찬가지로 앤서니 디 이오리오 역시 캐나다 토론토 출신이다. 그는 마케팅과 벤처 캐피탈에 손을 댄 다양한 비즈니스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또한 캐나다 비트코인 얼라이언스의 집행이사로 토론토에서 첫 번째 비트코인 써밋(Bitcoin Summit)을 조직했다. 2012년 11월에 열린 비트코인 모임에서 그는 비탈릭을 만났다.
그와 공동 설립자 조셉 루빈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역시 부자 아빠를 둔 2세였던 것. 그는 2013년 말 투자에 참여하고 이더리움을 공동 설립했다. 무엇을 담당했는지에 대한 상세 정보는 없다. 그러나 그가 이더리움에 참여한 것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셉 루빈처럼 이더리움의 비영리 운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더리움이 비영리 운영 방식을 확립한 뒤 디 이오리오는 이더리움을 떠나 토론토 증권거래소의 최고 디지털 책임자로 잠시 재직했다.
돈이 많은 것의 최대 장점은 자유이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16년에 증권거래소를 떠나 디센트럴(Decentral)을 설립하고 디지털 지갑 Jaxx를 개발했다. 이 지갑은 2018년 5월 처음 출시되었다.
같은 해 디 이오리오는 포브스 잡지가 선정한 암호화폐 상위 20인에 올랐고 순자산은 7억 5천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추산됐다.
그러나 2021년 여름, 앤서니 디 이오리오는 개인 사정으로 암호화폐 업계를 떠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자신의 블록체인 회사인 디센트럴(Decentral Inc)를 ‘수 억 달러’에 매각할 계획을 밝혔다.
그가 얼마나 많은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공개된 바 없다. 그는 참여중인 다른 스타트업과의 관계도 끊고 더 이상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그는 자선 사업과 다양한 분야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 투자자 아미르 체트잇(Amir Chetrit)
아미르는 이스라엘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전문가지만 부동산 개발에서 목돈을 챙겼다. 그는 2008년 학교를 중퇴하고 금융 위기로 전통 금융시스템이 망가기지 시작했을 때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아미르는 2013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비트코인 행사에서 비탈릭을 만났다. 당시 그는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자산 관리를 목표로 하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컬러드 코인스(Colored Coins)와 협력하고 있었다. 비탈릭도 이더리움을 제안하기 전에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2013년 12월, 아미르는 비탈릭의 초대를 받아 이더리움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애당초 부동산과 투자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기술이나 이더리움의 비전 자체에는 충분히 열의가 없을 수 있었고 그가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도 별로 소개된 게 없다.
2014년 6월 공동 창립자 회의에서 아미르는 이더리움 개발자와 다른 공동 창립자들로부터 이더리움에 대한 헌신 부족으로 비난을 받았고 사임을 결정했다. 그는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다.
7. 집으로 돌아간 아빠 제프리 빌케(Jeffrey Wilcke)
또 다른 개발자인 제프리 빌케(Jeffrey Wilcke)는 네덜란드 1호 ICO인 마스터코인(Mastercoin)을 작업할 때 이더리움을 접했고, 그때부터 관심이 많아 조용히 구글의 Go 언어로 구현 페이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2014년 초 그는 개빈 우드와 함께 창립자 명단에 합류했다.
빌케의 소프트웨어 페이지 구축 여정은 Go Ethereum 또는 줄여서 ‘Geth’라고 한다. 그는 이더리움의 초기 개발에서 중요한 개발자라고 할 수 있는데, 개빈 우드가 C++로 이더리움을 구현했을 때 빌케는 프로그래밍 언어 고랭(golang)으로 이더리움을 구현했다.
그러나 이더리움 하드 포크, 일련의 해킹, 그리고 그의 아들이 태어난 뒤 빌케는 Geth의 감독 권한을 그의 핵심 협력자 피터 실라기(Peter Szilagyi)에게 넘겼다. 그는 현재 형 조에(Joey)와 함께 게임 개발 스튜디오인 그리드 게임스(Grid Games)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회사의 개발자 모집을 돕기 위해 ETH를 일부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 초심을 지키고 있는 비탈릭 부테린
8.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은 중국 암호화폐 팬들에게 ‘V신(V神)’으로 불린다. 매체들도 약칭으로 똑같이 쓴다. 그는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비탈릭은 천재 소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프로그래밍을 아주 잘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2012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는 달리 그의 성격은 내성적이다. 꾸미는 데 관심이 없고 개인적인 일상사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더리움과 개발에 관해 물으면 그는 몇 시간이고 떠들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가 비트코인과 초기 암호화폐 산업을 탐구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게임이었다. 그는 13세(2007년)부터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World of Warcraft) 게임을 했고 열렬한 팬이 되었다. 2010년 블리자드가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그가 가진 게임 캐릭터의 속성이 일부 조정됐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이 게임을 포기했다. 이때 그는 중앙화된 서비스의 공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시절 비탈릭은 정부 규제와 기업의 중앙화된 통제를 일종의 원죄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의 탈중앙화와 개인이나 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속성이 그의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트코인에 대해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이후 그는 비트코인으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각종 포럼을 뒤지다가 우연히 기사를 쓰고 비트코인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더리움이라는 아이디어는 비트코인을 개선하려는 비탈릭의 열망에서 탄생했다. 당시 칼럼니스트로서 많은 연구를 한 끝에 비트코인의 한계를 몇 가지 발견하고 커뮤니티에 제안도 시도했지만 당시 그의 말은 진중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비트코인 커뮤니티 거물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비탈릭은 BTC 이면에 있는 개념에 기반한 백서를 작성하고, 모든 것이 탈중앙화 되고, 검열 저항 애플리케이션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월드 컴퓨터’라는 블록체인 플랫폼의 시작이다.
이더리움의 시가총액이 한때 5000억 달러를 넘어섰을 때, 부테린은 이더리움이 이처럼 거대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도 예상치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이더리움을 시작했을 때 나는 몇 달 안에 끝내고 대학으로 돌아가려고만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그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그는 이더리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최근에는 조금 뒤로 물러나 이더리움 2.0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이디리움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유일한 공동 설립자다.
작년 9월 비탈릭은 이더리움의 여정에서 가장 크게 후회(비기술적) 되는 것은 “8명의 공동 창립자를 너무 성급하게 선택했고 모두가 떠나가게 내버려둔 일”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소그룹은 생각보다 긴밀히 조정하기 어렵다. 특히 거대한 인센티브가 충돌할 때는 그렇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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